나는 첫사랑에 대한 좋은 기억이 특별히 없다. 첫사랑을 풋풋하고 아련하게 기억하는 것은 미디어에서 주입한 로망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다.
특히 여자라면 정상적으로 연애를 계속 해 왔다고 가정할 경우, 정말 첫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인가 심히 의문을 갖는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리는 아름다운 첫사랑은 대개 남자 감독의 작품이 아닐까 합리적 의심을 품는다. 지극히 남성적 욕망의 반영이 아닌가 하는.

여자들의 경우 구남친을 다시 데려다 놓고 사귈 기회가 있으면 만날래? 라고 물었을 때 8할이 1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냥 절레절레 하는 수준이다.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식.
전남친의 경우는 좀 예외가 있다. 아직 완전히 전남친의 대체자, 다음 연애상대를 못 만났을 경우 전남친의 존재감이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도 아닌 전전남친부터, 구남친의 스펙트럼에 들어가는 순간 사실상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여자들의 머리에서는 더이상 유의미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왜 그럴까? 여자는 웬만해서는 점점 더 나은 남자를 그래도 찾아서 만나기 때문이다. 점점 더 사람으로서 발전해 간다는 뜻이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뿐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랑 더 잘 맞는 남자, 자기가 더 원하는 남자,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남자를 보는 눈을 키워간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처음엔 똥을 밟고 된장인 줄 알고 찍어 먹어 보고 갖은 실수와 흑역사를 쓰지만 점점 더 경험이 쌓일수록 사람 보는 눈이 생긴다. (이렇지 않고 있다면 당신의 정신세계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점검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런 정상적인 연애 패턴을 발전시켜 온 여자라면 '첫사랑'의 의미란 그저 '가장 미숙하고 부족했던 사랑'을 뜻할뿐이다. 조금 냉정하지만 그렇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이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고 봤을 때, '아 내가 그런 인간을 만났던 때도 있었지. 그게 가장 멋진 줄 알고 빠져버렸던 애송이 시절이 있었지' 하게 되는 그런 구질한 존재가 바로 첫사랑이다. 이게 여자들의 첫사랑의 실체다.
'첫경험'도 마찬가지다. 미디어가 심어놓는 첫경험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깨부수기 위해 첫경험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다. 현실은 절대 영화 같지 않다. 많은 경우 스킬이 부족하고 서로의 깜냥이 부족하여 불발하는 안 좋은 추억 한 조각이었지 않을까. 점점 더 보는 눈이 높아졌을 경우 나와 케미가 더 잘 맞는 사람을 가려냈다는 의미이므로 성적 스킨십의 만족도 역시 계속해서 높아진다. 동물적으로 서로의 유전자를 더 필요로 하는 상대방을 찾아내는 것, 이것은 경험을 통해 획득되며 관계의 전반적 만족도를 올라가게 한다.
나의 첫사랑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참 별로였다. 나의 남자 취향, 연애 스타일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허우대가 멀쩡하고 누가 보기에 하자가 없다는 이유로 가볍게 승낙을 했던 기억이다. 사실 조건으로만 보면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나은 케이스이긴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첫 남자친구 J는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내 기준에선 레벨이 낮은 남자였다. 결혼정보회사에 갖다 넣는다면 아마 점수가 가장 높을 수 있겠지만 연인으로서의 매력도로 따지면 가장 하위였다. 그러나 경험이 없었고 결핍만 가득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를 구분할 능력치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첫 연애를 스타트 끊어야겠다는 조바심만이 가득했다. J가 보기에도 겉으로 이렇게 멀쩡한 애가 아무 경험 없는 여자처럼 이상하게 굴었으니 어리둥절하고 남몰래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J는 전형적인 평범남 이었던 것 같다. 연애를 그냥 역할놀이 정도로 인식했다. 여자친구는 이렇게, 남자친구는 이렇게 라고 하는 세팅이 머릿속에 있었다. 공돌이답게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인풋 아웃풋을 넣고 기대하는 느낌이랄까. 데이트코스는 이렇게 완벽하게 쨘~ 나는 이케이케 여자친구한테 뭔갈 해주고 그녀는 내게 감동을 하고 우리는 드라마처럼 예쁘게 속살거리고 사랑을 키워가고 연애사진을 여기저기 뿌려놓고 흔적을 남기며 늦지 않게 결혼에 골인!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작조차 되지 않을 만큼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 지점에 있는 것, 쉽게 말해 내가 보기엔 너무 인위적인 연애놀이 플레이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그냥, 다 이렇게 하는 줄 알았다. 연애란 게 다 이런 줄 알았다. 아,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라고 하는구나. 하는거지, 이제와서.
요즘 '걸크러시'란 말이 유행하는데, J를 만나던 시점에 처음 나오기 시작한 말이었다. 나는 그 단어가 좋았다. 나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 같았다. J는 그 컨셉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응당 여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깨뜨리는 이해하기 힘든 변수 같은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걸크러시 캐릭터"라고 하자 J는 "안돼. 걸이 크래시 되잖아"라고 답했다. 짜게 식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같이 걸을 때 내가 좀 신나서 씩씩하게 앞서 걷기라도 하면 왜 그렇게 씩씩하냐고 그는 당황했다.
내가 오글거려서 싫다고 하는데도 '아가' 라는 애칭을 고집하며 혼자 불렀다. 도저히 안 맞는 것 같아 안 되겠던지 그만 만나자는 말을 카톡으로 할 때 그는 바로 몇시간 전까지 부르던 그 애칭을 한 순간에 내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그 정색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것이 나의 첫 연애가 파국을 맞던 순간이었다.
나는 J를 남자로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었지만 그의 헤어지자는 말에는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그게 첫 연애라는 것이다. 첫사랑의 무시무시한 실체란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피식 웃을 만큼 너무 순진했던 시절. 이별통보를 받으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던 어리고 여렸던 마음. 배신감과 당황스러움, 버려졌다는 아픈 마음이 뒤엉켜서 한동안 정말 힘들었다. 문득 문득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고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렇게 첫번째 성장통을 겪어냈다. 참으로 장하게 견뎌낸 시간이었다.
다음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연애의 맛이란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J는 한참 별로인 남자였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보다 연애 경험은 많았기 때문에 우리가 영 아닌 커플이란 걸 나보다 먼저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연애의 참맛을 보며 황홀해하면서 별안간 J에게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이 피어났다.
'나를 차 줘서 고마워. 먼저 버려주지 않았다면 이 기쁨 평생 몰랐을 텐데.'
이건 정말 진심이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웬일인지 나를 먼저 버려주었다. 그들의 이별통보를 받는 순간은 지독히 아프고 힘들고 외로웠지만 수개월의 고독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 새 사랑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전남친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내가 먼저 이별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먼저 떠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조금 힘들어했을지언정 결국 내가 그 기회를 잡아채어 더 나은 사랑과 더 나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되었음에 가슴이 벅찼다.
당신의 첫사랑, 당신의 가슴 아픈 이별은 환상을 걷어내고 보았을 때 결국 축복이다. 그 흑역사 또한 나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어두운 과거가 있었기에 빛나는 지금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사람들에게 그저 고마움과 아득한 사랑의 마음만이 남게 되었다. 다만 서로의 주변을 맴돌기보다는 먼 곳에서 응원해주는 그런 관계성이다.
이런 종류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연애와 사랑의 힘을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나아가 나라는 인간을 보다 완성도 있고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자양분으로서 활용하게 되었다.
고맙다, 나의 모든 엑스들아! 잘 지내길 바란다. 비록 종종 내 생각이 나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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